'박사생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4.26 "열심히"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2
  2. 2016.05.09 점심을 빼앗긴 학생들의 반란 2


박사학위라는게 일반적으로 익숙한 1-2년 과정의 대학원과는 다른게, 

또는 4년 과정의 의과나 법과 대학원과도 다른게.. 

박사학위는 정해진 졸업이 없다. 성과에 따라 잘하면 빨리 졸업한다고 하지만 

실제론 그것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잘하면 발목 잡혀서 졸업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본인은 너무 잘했는데 운이 나빠서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경우도 있고,

본인은 열심히 잘하고 있는데 교수와 상성이 안맞으면 또 헬게이트가 열린다. 


학위 기간이 미정인데다가 

"이정도면 졸업해라" 라고 결정하는 칼자루는 지도교수가 쥐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박사생과 지도교수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인거 같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애 보다는 증의 퍼센트가 높아진다...) 


내 박사과정은 연대기순으로 요약하자면, 

2012년에 석박사 통합과정인 대학원에 입학해서,

2013년에 A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정하고 연구조교로 일을 하다가

2015년에 A교수님이 아카데미아를 뒤로하고 회사에 취직하는 바람에, 

2015년 12월부터 B교수님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2017년 4월 현재, 5학년을 마치고 올 9월부터는 박사 6년차가 된다. 

박사 6년차라고는 해도 실제 지금 실험실에서 내 연구를 한 기간은 1년 4개월정도.. 


지금 B교수님은 4학년에 다시 맨땅부터 시작해야하는 내 상황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해주고 억울해 해주고 

A교수님이 내 펀딩(=내 월급)에 관한 말을 여러번 번복하면서 일이 지저분해지기 시작할때 

나서서 걱정하지말라고 본인이 다 해결한다고 안심시켜주고 그런 분이다. 


성격도 호탕해서 나랑 농담따먹기도 자주하고

신기한 간식 선물받으면 지나가면서 내 책상에 놓고 가주고 

내게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때는 차분하게 그 상황에 대해서 브리핑도 해주며

"일단은 너도 관련된 일이니 너도 알아야한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이렇게 대처해서

네가 불이익을 안당하게 ##하자는 결론으로 이끌어나가겠다" 

이렇게 해주는, 아 쓰면서도 보니 정말 둘도 없을 배려넘치는 지도교수다. 


그런데 이것도 내가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지 ㅋㅋㅋㅋ 

아무리 내가 부처님 예수님과 일해도 내가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만성피로로 늘 미열과 충혈된 눈으로 살다가 보면


"열심히 해서 논문 하나 더 내야지, 그래야 너한테 좋다. 

그리고 이번에 결과 발표하면 과에서 너보구 1년안에 졸업하라고 할텐데

그거 1년 연장해서 7학년 꽉 채우고 졸업하면서 논문 하나 더 내는게

네 장래에 훨씬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과에다가 너 1년 더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겠다"


이런 교수님의 말이 참 쓰게 다가올때가 있다


저 말이 틀린건 하나도 없는데

1년 더 실험하는게 논문으로 나오려면 논문까지 내가 다 써야하는데 

1년 안에 그건 비현실적인거 같고


나름 일주일에 50시간 정도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더 해야해 더, 더 열심히 해야해! 

대학원생은 일주일에 60시간정도 일하는게 적당한거 같애" 

이런 말씀을 하시는거도 맥빠질때가 있고


알고보니 우리 실험실의 4명의 박사생 중에서 

나에게만 이렇게 (애정어린?) 채찍질을 하는 걸 알았을 때  

'아 내게 거는 기대가 크구나, 이 기대에 보답해야겠다'가 아니라

' 아 진짜.. 쟤는 맨날 조퇴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가 먼저 떠오르는거다. ㅠㅠ


사실 전자의 반응은.. 나중에 내가 유명해져서 지도교수를 떠올리며 어디 인터뷰에서나 하는 말이지, 

진짜로 맘 속 첫 반응이 저런식이라면..

글쎄....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ㅋㅋㅋㅋ 


내일 모레 커미티 미팅*이 있어서 지난주에 80시간정도 일하고, 

주말내내 일하고, 이번주도 매일 아침에 눈뜨자마자부터 자기 전까지 컴퓨터 앞에서 

데이터분석하고 현미경 사진 다듬고 피피티 만들고, 

오늘 지도교수님이랑 만나서 결과토론을 한바탕 했다. 

(*커미티 미팅: 박사생들이 무책임한 지도교수를 만나서 허송세월하거나 않도록, 

박사생이 본인에게 도움이 될 교수를 3-4명정도 정해서 

지도교수 외의 교수들에게 졸업 프로젝트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모임.

지도교수가 성격파탄이거나, 박사생을 방치하거나, 그릇된 방향으로 플젝을

자꾸 몰아가는 경우에 이 커미티의 교수들이 제재를 가할 수 있음)


어 그런데 결과 토론 후에,  

커미티 미팅 끝나는 목요일 오후부터 할 일과

그 담날인 금요일날 해야하는 일과

오는 주말 안에 이거이거 분석 좀 다 해야겠다며 일을 막 던지시는게 아닌가.  


아 교수님 나 죽겠소!

근데 또 보니 진짜 나한테만 그래!

왜 다른 애들은 커미티 끝나고 좀 쉬게 해주는데 

나한테 이렇게 빡시게!! 돌리는 것이오!!!!!!!!!! 

여름에 학생도 하나 맡으라 하고!!

조교도 하라하고!! 실험은 이 속도 그대로 가라고 하고!!


일을 많이 하는건 괜찮은데

이게 내가 동기부여가 되어서 일을 많이하는거랑

' 아 이거까지만 죽도록 달리고 한숨 돌려야지' 하는 찰나에

목구녕까지 차오르게 일을 주고 몇일 간격으로 재촉받으며

일을 많이 하는건.. 

내 멘탈의 상태가 너무 다르다 


그래, 잘 하려면 열심히 해야지.

근데 얼마나 열심히 해야돼?

최선을 다하라고?

최선을 다하는 거 좋다, 근데 내 삶이 망가지면서까지 최선을 다하는건

정말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인거. 

어디서부턴가는 나의 존엄성을 위해서 선을 그어야 하는거 같다. 


그리고 내가 초인적인 일정으로 일을 많이 하고 데이터를 많이 생산해내면

그게 어떤 괴로움을 동반해서 나오는 건지 남들은 알수가 없다. 

본인이 괴로웠던게 아니니 옆에서 보기엔 결과가 운이 좋아 쉽게 쉽게 나오는 걸로 보이고

쉽게 쉽게 나오는 거 같아보이니

쉽게 쉽게 요구하는거 같다.. 


실험에 들이는 시간/노력과 연구의 진도는 얼추 비례하며 증가하다가 

결국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비범한 연구의 생산성은, 

내 속을 갉아먹고 내 삶을 희생하는 댓가로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받는거...


학교 내에서는 숭고한 과학을 위해서는 그럴수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존재하는데

그 분위기는 고용주(학교/지도교수)들에게 용이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런 압박 속에서 "더, 더, 더"를 요구받다가 그게 내재화되어서

스스로 그렇게 삶을 희생하며 살아야만 과학자가 될 수있다고 뿌리깊게 믿기 시작하는 거같다. 


휴식도 없고, 나를 위한 시간도, 사회적 관계를 위한 시간도 여유도 부족하여

점점 더 "일이라도 더 하자"로 이어지는 악순환. 


이 악순환에 끌려들어가는 사람들을 계속 봐오고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각오하면서 대학원을 들어왔는데도 

나 또한 교수님의 요구를 반복적으로 듣다보니 심리적 압박에 못이겨 

악마와의 거래에 손을 대려는걸 보고 식겁했다. 


교수님은 교수님의 입장에서 일을 많이 줘도 해내는 학생이면,

당연히 더 일을 주고싶고 계속 이렇게 일을 하기를 기대하겠지.


그래도 무리인건 무리야. 교수님 저도 좀 살아야겠어요. 

주말에 하루는 쉬어야겠어요. 어차피 내가 힘든건 온전히 내 몫이잖아! ㅠㅠ 



Posted by 민들레_ :

우리 학과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Student Seminar을 한다. 

금요일 점심시간에 이루어지는 이 학생세미나는 과에서 주도하고 학생들이 돌아가며 발표를 하는 자리이다.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기회를 자주 가지면서, 피드백을 받아 발표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리. 


학생들이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자리이면서 (출석체크를 한다!)

과에서는 학생들의 참석률을 돕기 위해 점심을 주문해주곤 했다. 


4년 전, 처음 1학년으로서 이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에는 

다양한 메뉴 중에 고급음식인 스시가 종종 주문되어 있기도 했고,

2, 3학년 때에는 스시가 빠진 중국음식/샌드위치/화덕구이피자/미국피자 중의 옵션 중에서 오더니

4학년 후반이 되자 메뉴가 샌드위치로 고정이 되었고.. 

지난 주.. "점심 주문을 중지하겠다" 라는 과의 이메일이 왔다.


우리 세미나(12시 시작)의 전 시간대(10시-12시)에, 같은 세미나실에서 수업이 있는데

우리 세미나의 사람들이 그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었다는 신고가 있었다고. 


대체 누가 그런 무개념한 행동을 했나!!! 하며 슬퍼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전 시간대의 학생 하나가 뒤에 세팅이 되는 샌드위치들을 보더니 세미나 하러 온 아이들에게 "나도 이거 먹어도 돼?" 라고 물었다가... 세미나 학생들이 "아니 이거 세미나 하는 사람들 먹으라고 준비된거야" 라는 대답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본인들의 수업시간에 늘 방해가 되었다며, 과에 강력히 항의 하겠다고.


상황을 정리하고 보니 음식을 배달해주는 분이 

전 수업시간이 끝나기 전에 회의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서 음식을 세팅하고 나왔던 것이고,

그 것 때문에 수업을 하던 사람들은 방해를 받았던 것. 


세미나를 하던 우리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채 점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ㅠㅠ 


이렇게 억울한(?) 상황이 되자, 안그래도 음식의 종류가 점점 박해지던 상황에 불만이 있었던 학생들은, 

'차라리 잘됐다!!! 됐다그래!! 내가 내일 체코 디저트 갖고올게, 그거 같이 먹자!!" 라는 동기의 이메일을 시작으로 

"나는 라따뚜이 만들어올게 / 나는 스패니시 오믈렛 만들어 올게 / 나는 음료수 가져올게 / 나는 와인 가져올게..." 등등의 이메일들을 꼬리에 꼬리를 이어 돌리기 시작했다. 


팟럭 파티 분위기가 되어 나도 들떠서 마늘빵을 구웠다. 


버터, 올리브유, 생파슬리, 잘게 자른 페퍼로니와 섞은, 오븐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Garlic knot

그러나 빵 반죽을 만드려는데 하얀 밀가루가 떨어져서 통밀가루를 섞었더니 

빵이 부풀질 않아 딱딱해졌다는 ㅠㅠㅠ 슬픔...

학생들이 가져온 각종 음료와 주류.

주스파, 와인파, 맥주파, 탄산음료파가 다양하게 골라 잡을 수 있는 드링크바~

세미나실에서, 음식을 가져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서있는 학생들

오른쪽의 책장 뒤에 뒷문이 있는데, 문 밖으로까지 줄을 서있다. 

음식이 동나기 전에 한장 찍으려 했는데....

너무 순식간에 음식들이 사라져서 찍을 새가 없었다.. 


기억나는 것만 적어보자면: 

닭 구이, 닭튀김, 라따뚜이, 체코의 디저트빵, 두툼하고 감자가 들었던 스패니시 오믈렛,

4가지 맛의 감자칩, 쿠스쿠스 샐러드, 퀴노아 샐러드, 두가지 컵케익, 6종류의 쿠키..


심하게 영양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는 나의 음식 선택 ㅋㅋ


이 모든 음식들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기 때문에 상황이 되는 일부의 학생들이 준비해온 것이었는데,

학기의 마지막 세미나인 다음 주에 

이번 주에 음식을 준비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또 다시 팟럭을 준비해온다고 한다. 



ㅎㅎ 과에서 생긴 오해로 인해 무료 점심이 없어졌지만, 

이 상황에서 슬픔을 승화시켜서 

즐겁고도 다채로운 메뉴를 가능케 한 우리 과 학생들~


유쾌한 결속력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었다 :) 

다음주도 기대하겠어! 

Posted by 민들레_ :